
1월에는 한가하면서도 바빴다. 무엇 하나에 집중하는 게 어려워서 이것저것 잡아 읽다 보니,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럼에도 소소하게 좋았던 책이 있긴 했다.
1.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백살인지, 아흔살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노인이 자신의 옛 연인을 기억한다. 매일, 그를 기억하는데 모든 시간을 쓴다. 중년의 나이에 만나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가 있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그에게 빠져들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어쩐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떠올리게 했다. 스토리도 그렇거니와, 사랑과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생각이 끊임없이 흐르는 서술 방식이 에르노의 글과 닮았다. 사랑의 속성에 대해, 그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는 방식이 굉장히 유사하지만, <슬픈 짐승>은 '기이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던 한 시절 때문에 엇갈렸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이들은 더 빨리 서로를 만나 사랑을 했을 수도 있다. 시대는 그런 가정 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2. 유디트 헤르만 <단지 유령일 뿐>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이 사람은 대체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우리의 관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은 무엇일까. 딱 잘라 한 문장으로 길어낼 수 없는 기묘한 관계들, 유디트 헤르만은 그런 관계가 빚어내는 차갑고도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다. 7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을 몇 번 돌아가며 다시 읽었다. 그 묘한 순간, 일어나는 스파크를 잡아내기 위해 여러 번 재독했지만 도무지 그 자락을 잡아낼 수 없었다. 삶이 그렇듯.
3. 메리 루플 <나의 사유 재산>
미국의 시인 메리 루플의 에세이. 표제작인 <나의 사유 재산>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고 오랫동안 읽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문득 아름다운 글이 읽고 싶어져 책을 펼쳐들었다.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에세이는 삶과 늙어감, 슬픔에 대해 다뤘다. 시와 소설, 에세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 리디아 데이비스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메리 루플의 글은 시적이다.
4. 배리 로페즈 <북극을 꿈꾸다>
미지의 땅인 북극의 생태를 다룬 책. 절반 정도 읽었고 완독은 못할 것 같다. 책이 별로라서가 아니라, 정보의 양이 방대해 가끔 한 챕터 씩 읽는 방식으로 읽는 게 좋을 듯하다. 여전히 인간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땅이 있고, 그 안에서는 기술도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는 게 신비롭다. 겸허한 마음이 된다.
5. 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1월에 읽은 책 중 최고를 꼽자면 이 책이 아닐까.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 제니 오델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권한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하는 지를 이야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자신 안으로 말려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위해서, 한 가지 시선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빤한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빤한 일을 우리는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각종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 책으로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선택해 읽고 있다.
'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월 독서일기 2 - 소녀의 성장에 대하여 (4) | 2023.11.09 |
---|---|
공간에 관한 책 2권 - 23년 10월 (1) (2) | 2023.10.19 |
소설 읽기에 대한 일기 - 23년 9월 책일기 (2) | 202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