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첫 번째 주에는 공간에 관한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이광호의 <장소의 연인들>과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이다. <장소의 연인들>에선 공간/장소에 관한 추천 책 리스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이었다. (마침 도서관에 다른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페렉의 책부터 읽게 되었다.) 두 책은 비슷한 구성을 지녔고, 공간/장소에 관한 생각이 유사하다. 공간은 '동사'로 존재하며,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곳은 의미를 획득해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존재하게 된 공간은 물리적으로 변하더라도 (설령 없어지더라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 개념이 재밌었다.
BOOK 1. 이광호 <장소의 연인들>

특정한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장소의 물질적·지리적·구조적 특징 때문이 아니라, 연인들의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 어떤 특정한 장소들은 '사랑-하다'의 행위를 통해 '장소-하다'의 자리가 될 수 있다. 거기에서 연인들의 몸이 무언가를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공간에 침투하여 그 공간의 형질을 변경하는 사티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그래서 잠재적이고 임의적이다.
우리 집은 하나다. 원룸이라 움직일 수 있는 폭도 한정적이다. 하지만 내 집은 다양한 모습을 한다. 나의 연인이 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왔을 때, 혼자 있을 때, 혼자 일하거나 작업을 할 때,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곳의 용도가 변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똑같았던 물리적인 조건, 가령 조도와 습도, 온도 같은 것들도 변하는 듯하다. 내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더 어둡고 촉촉하게, 웃고 떠들 땐 크리스마스 트리마냥 반짝이는 공간으로, 혼자 집중하고 있을 땐 한기가 돈다. 그로 인해 내 방을 묘사할 때 다른 표현을 쓰게 된다. (심지어 방문자들도 우리 집을 다르게 기억한다) 이렇듯 하나의 공간은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변화한다. 내 머릿속에서.
이광호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썼다. 연인들이 머물고 스쳐가는 장소를 하나 씩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책과 영화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공간으로부터 시작해,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를 연달아 적어 공간을 실체화 한다. 이를 통해 그 공간의 물리적인 형태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공간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그 구체성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읽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공간을, 연인과 함께 했던(혹은 영화나 책 속에서 보았던) 공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진 한 장 없는데도 사진첩을 본듯한 책이다. 한 챕터 씩 천천히 곱씹으며 나의 공간들을 떠올렸다. '동사'로 존재하는 그 공간들을.
BOOK 2.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알고자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궁금해하지 않는다.
페렉의 말처럼 '그 당시'를 떠올리지만 '그 장소'를 떠올리진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모두 공간(장소)에 기대어 있다. 그때 내가 경험했던 건 그 장소이기에 기능한다. 그러므로 장소를 떠올리기 위해선 그 경험을 꺼내야 한다. 그곳에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려야만 그 장소가 구체화된다. 그렇게 공간은 존재한다.
실로 물리적으로 공간/장소가 변화를 많이 겪는 때다. 1년 전 찾았던 카페가 사라져 있는 경험은 많은 이들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소의 흔적은 어디서 떠올릴 수 있을까. 검색을 통해 찾은 수많은 사진들로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내가 경험한 공간과는 다르다. 내가 찾았을 때 느낀 감정, 생각을 고스란히 불러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뿐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공간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한다. 나만의 기록이 필요하다.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를 읽은 후부터 집에서 술자리가 있던 다음 날, 테이블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그날 누가 있었는지가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진을 통해 여러 단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떠들었는지를 상상한다. 때로는 영화를 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그 공간을 소유한다. 단 한 번 존재했지만, 이 사진을 통해 영원히 존재한다.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책 말미에 페렉의 말처럼,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곳을 정복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유하는 내 존재를 어느 한곳에 고정시켜둘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록'한다. 글이든, 사진이든 어느 방법을 통해서라도 나는 기어코 공간을 소유하려 노력한다.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에 읽은 책들 (1) | 2024.02.06 |
---|---|
10월 독서일기 2 - 소녀의 성장에 대하여 (4) | 2023.11.09 |
소설 읽기에 대한 일기 - 23년 9월 책일기 (2) | 202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