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끝났다. 밤이 되면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과 이 바람을 즐기고 싶단 생각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이른 아침 추위에 눈을 뜬다. 나이가 먹을 수록 계절을 떠나보내는 일에 질척이게 된다. 올여름을 더 즐겁게 보낼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계절이 빠르게 가버리면 내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조바심이다. 역시나 올여름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책을 겨우겨우 읽어냈다. 나는 과연 무엇이 되려나? 왜 이 고민은 서른중반이 되어도 끝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달부터 무엇이라도 시작해보려, 한 달 동안 읽은 책은 갈무리하는 글을 남겨 본다. 읽은 책 전부를 쓰자니 부담이 될 것 같아, 2권의 책만 추린다.
일기1 올가 토카르추르 <다정한 서술자>
1인칭 소설과 에세이가 범람한다. (나를 포함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아지며,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1인칭 소설과 에세이(글 뿐만 아니라 영상을 포함해)를 통해 우리는 한 개인의 목소리를 더 내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1인칭 소설이 처음 태동했던 때, 개인의 위치가 높아진 것처럼, 개개인의 목소리가 의미 있어졌다. 그 목소리들은 한데 모여 시대정신이 되기도 한다.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상황이 지닌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경계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상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우려를 대변하는 현실 같다.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반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진 않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면 더욱 쉽게 읽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이에 대한 비난도 쉽게 한다. 알고리즘 시스템이 정교해질 수록 내가 공감하고 관심 있어하는 콘텐츠만 소비하기는 더욱 쉬워진다. 우리는 쉽게 나만의 성에 갇힌다. 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성 너머에도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에,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은 '알기에' 생기는 것이니까.
올가 토카르추크는 그래서 글 쓰는, 특히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내 안의 서술자가 글을 쓸 수 있도록 한 발 물러나라고. 그가 말하는 서술자는 분명 내 안에 존재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 목소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평소 나였다면 하지 않을 행동과 생각을 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를 나는 차분히 받아 적으면 된다. 어떤 재능 같은 게 아닐까 싶지만, 올가 토카르추크는 훈련하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치 거친 레스링을 하듯, 글과 싸우다 보면 나올 수 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올가 선생님)
<다정한 서술자>를 읽으면서 2011년 뉴욕 주코티 파크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한 연설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진 마십시오." 오직 내 앞에 있는 것만, 나는 여기까지 했으니 되었다고 안주하지 않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타자가 존재해야 내가 존자한다'는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서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행위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서술자는 이야기의 혼이고, 말하는 목소리이며, 이야기의 숨겨진 태생적 결함이 동시에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나머지 다른 요소를 배열하고 정돈하는 추가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끝으로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인간에게는 영혼과 육체, 그리고 서술자가 있습니다. - 올가 토카르추르 <다정한 서술자> 228P
일기2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애인과 있을 때 침묵만 흐를 때가 있다. 정말 할 이야기가 없을 때도 있고, 마음 속에 온갖 말들이 떠오르는데 내뱉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겠다는 것도 아니다. 모르는 상태여도 괜찮다는 생각, 어차피 나와 당신은 전혀 다른 궤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 나는 그저 당신의 마음을 짐작할 뿐이다. 마치 1이 진짜 1이 아니라, 1과 가까운 숫자를 표기하는 것 뿐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멍한 표정, 그 너머의 생각을 짐작한다. 그 짐작은 대부분 틀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게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하라고 한다. 내 안에 들끓는 말 중 한 마디라도 제대로 전달한다면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린시절 유난히 소통에 실패했던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소통은 쌍방의 대화를 통해 합의점, 혹은 타인을 인정을 하는 과정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라면, 소통을 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감정에 대해서는 다르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고, 말고는 발화하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은 '느끼는'거지 '이해'하는 영역은 아니니까.
심리학적 "소통" 모델의 비호하에, 기업과 가정 양쪽에서 감정은 사고의 대상, 표현의 대상, 토의의 대상, 논쟁의 대상, 타협의 대상, 정당화의 대상이 되었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78P
에바 일루즈는 현대 사회가 가정과 회사에서 '친밀한 관계'를 말하며 소통할 것을 강권한다고 본다. 심리학이 직장과 가정으로 들어오며, 우리는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소통은 쉽지 않다. 특히,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소통은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소통하려 한다. 소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감정은 '사고의 대상, 표현의 대상, 토의의 대상, 논쟁의 대상, 타협의 대상, 정당화의 대상'이 되었다. 즉, 감정은 더이상 감정이 아닌 것이 되었다.
초합리적 바보란 판단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 선택을 내리는 능력이 비용편익 분석(통제를 벗어나는 비교 대상들을 합리적으로 계량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손상되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211P
무엇이든 계산하려 한다. 가장 감정이 오가야 하는 연인을 선택하는 순간조차, 우리는 상대를 수치화해 나와 비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나는 이것을 사실 당연시 여겼다. 삶에 중요한 선택을 할 때조차 '기회비용'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건 생존과 연결되기도 한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에서 이런 사회가 우리를 더 병들게 할 것임을 예고한다. 2010년에 쓰인 책이기에 예시가 고루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10여 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감정이 자본화 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자아를 상품화·합리화하는 초합리성과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판타지가 지배하는 사적 세계 사이에서 점점 분열되고 있다. 이데올로기란 우리로 하여금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어떤 것인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듯하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212P
책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의 주장을 뒤집어 생각해 보며, '합리성'에 빠지지 않는 관계를 생각한다. '그 사람 왜 그랬어'라고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지기 전에 이 '모순'이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아는 것,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읽으면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 생각이 날 수 밖에 없었는데, A와 B의 고리만 바라보았을 땐 알 수 없는 일을 총체적인 시선으로 전환해 보면 이해될 때가 있다. (비록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앞을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는데 소설 읽기는 도움이 된다. 공감하는 소설만 읽을 게 아니라, 더 넓은 시선으로 소설 읽기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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