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여 년 전 뉴욕 플러싱에서 6개월을 살았다. 매일 맨하탄에서 수업을 들고, 오후 시간에는 미술관과 도서관을 오가며 한가롭고도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럼에도 티켓을 연장하지 않았다. 그때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음에도 그 뒤로는 해외에서 거주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 6개월 동안 나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 내가 앞으로 이곳에서 삶을 꾸려간다고 해도 나는 영원히 이방인일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아마 내가 뉴욕 플러싱에서 보고 만난 사람들의 영향일 탓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늘 이 도시에 뿌리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들의 간절함은 항상 티가 났고, 나는 초조로 가득한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문지혁의 <고잉 홈>은 그 당시 내가 만났던 뉴욕의 한인들과 닮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뉴저지에 살고 있고, 스마트폰을 당연하게 사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헤이코리안'을 사용하며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한다. 그들은 학생 신분을 벗어날 나이를 지나쳤지만, 여전히 공부 중이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아니, 어느 자리로 가야할 지 조차 아직 선택하지 못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의 제목처럼, 이들은 '하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어딘지도 모를 자신의 집을 찾아 '고잉 홈'을 하면서.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남았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비겁한가?
늘봄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자주 자신에게 물었다.
비겁한가, 나는? 나 자신에게? - 문지혁, <뜰 안의 별>
뉴욕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9편의 소설은 읽는 내게 묻는다. '비겁한가?' 너무나도 아프게, '비겁한가,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나면 답을 해야 할 나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만다. 비단 뉴욕에서 살아가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 역시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지향하고 있는지, 그것을 드러내고 살아갈 수 있는지, 내가 가야 할 '집'은 어디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먼 타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듯, 이 불안한 하루를 보낸 인물들은 결국 내일도 같은 하루를 살아간다. 그들에게 기가 막힌 행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뉴욕에서의 생활을 버텨내는 건 단지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불안이 목 끝까지 차오른 어느 하루, 자신과 다르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혹은 이 다사다난한 도시로부터,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는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속 빵 한 조각처럼, 정말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내일은 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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