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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데리언 니 그리파 <목구멍 속의 유령>

by 읺무 2023. 9. 7.

 

목구멍 속의 유령, 데리언 니 그리파, 암실문고



  평소 주방 일을 즐긴다. 특히 요리를 할 땐 흥이 난다. 머릿속으로 레시피를 읊으며 재료를 꺼내 다듬을 때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식재료는 가지런히 놓여 자신이 쓰임 받을 것을 기다리고, 내 손에 닿기 좋은 자리에 놓인 각종 양념은 언제나처럼 나를 돕는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줄 사람이 있다면 재미가 배가 된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음식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넣었는지도 모르는 채, 내 음식을 자신의 입 안으로 넣게 된다. 그것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먹게 되어 있다. 기쁨을 느낀다. 엄마가 그러했듯, 그의 딸인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 <목구멍 속의 유령>, 데리언 니 그리파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시집 가려면 설거지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주방에 나를 세웠을 때, 나는 '그럼, 지금은 안할래'라고 말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게 주방 일을 시키지 않았다. 첫 애인은 요리에 잼병인 나를 자주 비난했다. '여자가 되어서 요리 하나 못한다'는 비난을 친구들이 있는 술자리에서 자주 말했고 나는 반감이 생기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런 내가 모자란 '여성'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때도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스스로 자처해 주방 일을 하게 된 건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밖에서 사먹는 음식이 지겨워, 나를 위해서 요리를 해야 했다. 요리 실력은 하다 보니 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주방 일이 내게 즐거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통제 가능한 세계'
 

늘 숨어 있는 그 원동력은 바로 통제에 대한 환상이다. 내 삶에는 내가 통제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중략) 하지만 나는 매일 모유를 생산하는 의식은 통제할 수 있다. 병들을 소독하고, 유축기 부품을 올바른 순서로 끼워 넣고, 꼭 필요한 기록을 공들여 써넣는 일. 내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수행하기로 한 그 모든 절차만큼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48P)

 
  아일랜드 시인 데리언 니 그리파는 아이 셋을 가진 엄마이다. 그는 아이 셋을 연달아 낳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또 한 번의 출산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남편과의 성관계를 괴로워 한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관계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잊어버렸다) 그는 모유를 생산하는 자기 자신을 더 없이 좋아하며, 아이들이 어지럽혀둔 집안을 청소하는 일을 즐긴다. 끊임없이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의 몸짓을 원한다. 그는 통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집안일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이것을 '여성의 텍스트'라 명명한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여성이 집안일의 즐거움을 운운하는 일이 시대착오적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런 여성을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여성들을. 그것이 모든 여성이 따라야 할 삶이 아니라고 하여, '여성의 텍스트'라 부를 수 없을까.  
 
  시인은 픽션 같은 이 에세이에서, 끊임없이 방을 닦고 유축기를 돌리고 씻는 동안에, 한 여성 시인의 삶을 뒤쫓는다. 죽어가는 남편의 피를 마시고 시인으로 탄생한 아일린 더브라는 19세기의 시인의 삶을 쫓는다. 아일랜드의 교과 과정에서 배울만큼 유명하고, 현대어로 꾸준히 번역이 되고 있는 서사시를 썼지만 그의 삶을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21세기의 시인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집안일과 육아에 열을 쏟듯, 광적으로 19세기의 시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삶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워버린 자리에 집안일과 육아를 집어 넣고, 아일린 더브를 넣어 버린다. 하지만 이 추적은 쉽지 않다. 온갖 가계도와 신문 기사를 뒤지고 뒤져도 나오는 건 그녀의 집안에 있는 '남자들'이다. 이렇듯 남성의 곁가지로만 존재하는 시인의 삶에 대해 데리언 니 그리파는 분노했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내 번역은 내가 하는 집안일과 비슷한 결과를 낸다. 정말 열심히 하지만 어딘가에 틈이 생기고 만다.
(같은 책, 59P)

 
  균열. 그의 추적은 그의 삶에 틈을 만든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해부학실에서 죽은 육체를 보고 도망쳤던 일, 어린시절 헛간에 들어가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었던 일, 아이를 잃을 뻔한 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졌던 일들, 그 때문에 생긴 갈등을 떠올린다. 여전히 자신을 지워가는 일상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보건 간호사가 한 말, "그럼 이것들은 다 뭘 위한 거죠?"라는 뼈아픈 말을 듣고 되세기면서. 이미 수많은 번역본이 나온 여성 시안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일, 추적이 불가한 삶을 끝없이 추적하는 일은 대체 뭘 위한 걸까.
 

나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나'라는 이 작은 존재가 그 모습 그대로 눌러 찍은 땅, 여성의 반복되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공간 속에 교묘하게 숨어든 것이다. 그 구멍은 내게 속한 장소처럼 느껴졌고, 새로 만들었으니만큼 새롭게 느껴졌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그 땅속에 몸을 밀어 넣을 때면 아주 오래된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그곳에는 다른 존재들, 보이지는 않지만 내 주위를 온통 둘러싼 존재들도 함께 있었다. (같은 책, 281P)

  
  시인이 어린시절 헛간에서 그가 파고 들었던 작은 공간은 온전히 '나'가 되는 공간이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공간, 고독한 공간을 그는 삶을 살아가며 잊었다. 타인의 눈에 보이는 욕망으로서만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학습하듯, 타자의 욕망 안에서 내 여성성을 만든다. 여성성은 시인의 정체성이자 나의 정체성의 일부다. 많은 여성들의 삶은 그렇게 직조된다. 그리고 지워지곤 한다. 목소리를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그 목소리가 유령이 되어 또 다른 여성에게 깃들어 버리곤 한다. 데리언 니 그리파의 목구멍에는 그 유령이 살고 있다. 어쩌면 그 유령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의 목구멍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데리언 니 그리파처럼 타인의 눈 속에 비추는 욕망으로만 존재했다. 그 안은 안온했다. 때로는 답답했다. 그럼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그렇지만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여전히 그 안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나는 때로는 나를 지우고, 불쑥 일어나는 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데리언 니 그리파가 20대 시절을 긴 방황으로 보낸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이 찾았던 헛간 속 구멍이 내게도 있었다는 걸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나 역시 돌아가고 싶었다. 
 
  "이것들은 다 뭘 위한거죠?" 시인을 아프게 했던 말이 내게도 들려온다. 왜 주방이, 욕실이, 방이 깨끗하지 않은지, 그런 와중에도 붙잡고 있는 이 수많은 종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내게 묻는 말 같았다. 나 말고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붙잡고 있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타인이 또는 스스로가 이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공격 받았을 것이다.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시인의 말이 뼈 아팠다. 그래서 더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독서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해 준 책.